돈 인지상정, 의심/비판이란 원가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다시 보고 있ㄷ
처음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얼추 대개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던지
그런데, 몇백년ㅇ 흘러도 여여하게 흐르는 우리네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곳ㄹ곳에 느껴진다. 내가 62세에 지금도 급여생활을 하는 이유도
주어지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을 해서, 그 댓가로 급여를 수취하는 그런 삶이 이어지는 것은 이것 없이도 살고 싶은 그런 생계의 수단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생계의 수단에 대한 인지상정상의 목표지향성은 굳이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깨달음이 든다
마치, 운전하면서 끼워들기가 불가피한 것처럼
그리고 적절한 합ㄹ적인 의심의 습관도 필요한 것처럼
내내 그런 의심없이 그냥 믿어주는, 그게 더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돌ㅇ켜보면, 이런 의심의 시간과 노력도 또한 불가피한 댓가 일 것이다
중생, 사회생활에서 나름 보람되게 살기 위한 의식주의 필수적인 원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깨닫음으로 든다
그렇다면 의심은 비판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행 없이 혼자 미팅에 참여할때 그건 아마도 개인적으로도 투자를 검토하고자 하는 의향을 보이는 것이라는 의심은, 굳이 안 듨ㄷ 있겠고, 수행 없이 혼자 다니는 소탈함으로 해석될 수도 있겟ㅈ만 그렇게 읫심해보는 것, 이게 내가 지금 모시고 있는 오너 경영진의 생각이니, 권위가 있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타당성이 있을터
그렇다고 그부니 나쁜분인가, 전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인 말씀대로 이성이 6:4로 감성에 비해 더 우세한 그런 구성일 뿐일 것이다
그 반대의 성향인 우리 같ㅌ은 사람들은, 아마도 지레, 그렇게 의심하는 측면으로 접근하면 머리아프니까, 좋은게 좋다는 명분으로 그냥 눈 감고만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타조가 모래판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경영학에서, 대기업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관점이 가장 컸고, 그만큼 교육받으면서 기어에 남는바, 그렇다 환경, 둘러싼 영향력들, 더불어 그네들의 organic developement, 그 과정들은 그 자체로 분석과 공부의 대상이 충분히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경시하는 남산골 깔딱발이처럼 사는거, 그게 오히려 문제다. 그게 조선시대 향교나, 서당, 도산 서원 등의 문제였을것이다. 동산 아래 저 밭과 논에서 딸흘리면서 농사일 하는 항ㄴ들, 평민들을 바라보면서 그네들은 공ㅂ했덨 것일터, 그래서 중국 송나라의 주자학이 오히려 조선시대에 절정에 도달할 정동였고
그럴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지만, 사단칠정론이라는 극단적 사고논쟁까지 벌어졌던 것 아닌가 싶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이게 직접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묻는 자세는 묹이지만, 그냥, 그야말로 아무생각도 이해관계에 ㅐ한 정서도 없이 일기마 ㄴ하는 거, 그게 바로 옆의 동행에 전혀 도움이 못되거나, 그러려고 불끄지 않고 책읽으면서 수면에 방해ㅡㄹ 주거나, 거실 TV 시청에 방해만 된다면, ㄱ게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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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해가 가는데, 또 눈을 보니, 금년에는 유난히 눈이 많다 싶다
굵직한 사건들이 이었지면서 정말로 제대로 인식론을 되새기지만'
절로 명상과 기도로 연결되던 금년 한해
내년 2024년에는 이제 국민연금도 수령하게 되면서, 그때부터는 좀 여유도 생기려나 싶다만,
어쨋든 오늘 아침 눈뜨면서 또한 유난히도 감사한 마음도 든다
의심하지 않으면서 살앙온 과정은 한편 내야할 원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묻어서, 공짜로 살아왔던 것이라면 내년부터는 응당 비용지불을 할 각오이며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더 깊은 차원에서,
이젠 그야말론 입문서를 넘어서
좀 중급 이상의 공부를 해야할 것 같으며,
여기에서 비로서, 삶의 의미가,
종교적 가르침이 더욱 힘을 발휘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느님이 그리도 얄팍한 분이 아니실 뿐더러
삶과 중생 사회생활의 그 의미는 깊이가 훨씬 클 것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