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박사, 이 시대의 멘토 옮겨온 서평書評

2024. 5. 3. 07:20네이버 독서 이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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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우연히 알게된 분인데

오늘 아침에 저서 한권을 다시 보고

이런 블로그 내용을 발견

 

정말 닮고 싶은 삶의 궤적인 것 같다

 

 자연체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style="margin: 0px;">

비행장에서 경비를 서다가 졸았다는 이유로 미국인 상사에게 매를 맞은 뒤 예일이나 하버드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했던 소년. 그 소년은 정말 예일대에 가서 사회정신의학을 공부했다. 병원 없는 사회를 꿈꾸는 ‘국민 의사’ 이시형 박사다. 그는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던 화병(Hwa-byung)을 세계 최초로 정신의학 용어로 만든 정신의학계의 권위자이면서 <배짱으로 삽시다>, <이시형처럼 살아라>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명강사다. 그는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면서 자연의학에 눈을 돌리게 됐고 2007년 국내 최초의 웰니스마을 ‘힐리언스 선마을’을, 2009년에는 ‘세로토닌문화원’을 건립하며 뇌과학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1995년 대한신경정신학회 벽봉학술상을 수상했고 2011년 국민훈장을 받았다. 그가 걸어온 길과 그의 삶의 철학을 만나보자.

이시형 인터뷰영상

 

젊은 시절 이시형 박사. 고등학교 시절에는 특별한 사명감 없이 의대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는 ‘국민의사’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대구 공항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지저동’이라고 공항 뒤편에 조그마한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태어났어요. 우리 삼촌이 독립운동을 해서 형무소에 갇히셨는데, 내가 둘째 아들이라서 삼촌 댁에 양자로 갔죠. 그때는 독립운동을 한다면 풀려나올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근데 용케 삼촌이 풀려 나오셨고 사촌동생이 태어나면서 다시 본가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은 삼촌 댁이 있는 대구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문화재관리국 관리였어요. 성균관 출신이셨는데 유교 재단이 문경에 많아서 아버지가 향교 같은 유교 재단을 관리하셨습니다. 그렇게 문경에 2년 있다가 해방 후 대구로 돌아왔죠. 그리고 계속 대구에 살면서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 경북대학교를 거쳤는데, 내가 살았던 걸 따져보니 대구에서 40년, 서울에서 40년 살았더라고요.

 

아버님이 성균관을 다닐 때는 명륜전문학교라고 했어요. 일제 강점기에 과거 제도가 없어지고 고등고시가 생기기 전에 ‘양현고’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어진 선비를 기른다는 취지였는데 전국 8도에서 제일 우수한 선비를 두 사람씩 국비 장학생으로 뽑아서 유학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그 과도기 때 명륜전문학교, 지금의 성균관대학을 졸업하시고 문화재관리국에 계셨습니다. 두 명의 삼촌들은 독립운동한다고 정신이 없었고요. 어머님은 그 시절 엄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여자라서 초등학교도 못 다니셨지요. 하지만 혼자 한글을 터득하셨고 시집 올 때 문학책을 두 질 가지고 오셨어요. 학교는 안 다니셨지만 똑똑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때는 미군이 도시를 폭격한다고 해서 일단 시골로 가는 게 피란이라 생각했어요. 인민군들이 북에서 내려올 때 할아버지가 한꺼번에 죽으면 안 된다고 가족들을 3분의 1로 갈랐죠. 3분의 1은 대구에 남고 3분의 1은 진외가(아버지 외가)로 가고 나하고 친동생들은 청천 고모 댁으로 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인민군들이 포항으로 해서 영천까지 쳐들어왔고 북쪽으로는 낙동강까지 있었지요. 그래서 피란 갔던 식구들이 다시 대구로 모였어요. 알고 보니 대구가 제일 안전한 곳이었던 거예요. 한국전쟁 때는 그랬습니다.

 

형은 6대 종손입니다. 과잉보호를 받았죠. 형은 원래 얌전하고 말이 없었어요. 항상 손님이 오더라도 내가 쫓아나가서 인사드렸지 형은 비실비실 달아나고 그랬거든요? 어릴 적에 내가 손님한테 잘 안기니까 손님들이 용돈도 다 나한테 줬어요. 형은 주려고 해도 자꾸 달아나니까요. 어릴 적에 우리 집 바로 뒤 황동할매집에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손님이 오신 날에는 할머니가 나를 감나무 밑에 묶어놨어요. 형하고 나하고 비교되는 게 싫었던 거죠. 내가 워낙 설치고 (웃음) 손님들이 좋다고 하니까 할머니는 꼴보기 싫었던 거예요. 나중에 철이 들었을 때는 날만 세면 일단 나갔어요. 할머니한테 잡히니까요. 그때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생긴 거 같아요. 할머니 일어나기 전에 나가서 온동네를 돌아다녔죠. 동네 아줌마들을 잘 사귀어놔야 했어요. 그래야 삶은 감자라도 하나 얻어먹으니까. (웃음) 그때부터 사교성이 좋았어요. 동네가 경주 이가들만 사는 집성촌이기도 했고요. 다 일가였죠.

 

한국전쟁이 났을 때 형이 중등 6학년이고 나는 4학년이었어요. 전쟁 나고 형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했는데 다행히도 진해 포병학교로 갔어요. 형이 입대한 다음날에 입대한 사람들은 영천으로 가서 다 전사했거든요. 소총 쏘는 것 겨우 몇 시간 배우고 전투에 투입이 되니까요. 그 인민군들이 영천까지 쳐들어왔어요. 형은 8사단 포병대였는데 네 번이나 포위를 당했어요. 그래도 포병대니까 후방에 있었죠. 적군이 쳐들어오면 포병부터 후퇴를 시키거든요. 포병이 잡혀서 포문을 열면 달아난 우리 아군 등에 대포를 쏘게 되니까요. 그래서 형은 포위를 당해도 용케 안 다치고 피란을 나왔어요.

를 이돈형, 이시형 공저로 내셨습니다." style="color: rgb(75, 75, 75); font-family: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line-height: 20px; background-color: rgb(255, 255, 255);">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던 형님은 간혹 서울에 오시곤 했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형님, 미국 땅에 묻히실래요” 그러면 화를 버럭 내셨습니다. “아,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형님은 “나 죽으면 화장해 선산에 뿌리고 원혼이 떠도는 백마고지에도 고루 뿌려다오”하시던 분입니다. 형이 군에 있을 때 형을 면회하러도 가고 형이 집으로 휴가오기도 하고 해서 내가 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잘 알았어요. 그래서 그 책 중간중간에 내가 쓴 이야기도 들어가 있어요. 형은 평소에 말이 없지만 백마고지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밤을 새울 준비를 해야 했어요. 이야깃거리가 많았어요. 형은 휴머니스트여서 전쟁 이야기를 해도 그 바닥에 휴머니티가 깔려 있었죠. 포병대는 정사도 없고 야사도 없어요. 전쟁 때니까 기록이 소홀했거든요.

형이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까 포병대에서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포병이 창설된 10월 24일에 포병 전역병들이 다 모이기로 했죠.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요. 형이 피란가고 도망오면서 하룻밤 신세 진 사람, 전우들, 그리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아, 이건 나다’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쓰여 있으니까 모 방송사에서 사람을 만나는 프로그램에 내보내자는 이야기도 했었어요. 10월 24일 만난 포병대, 얼마나 극적이겠어요. 또 다른 방송사에서는 다큐를 찍자고도 했지요.

그런데 형이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어요.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언덕을 내려가다가 미처 못 보고 보드에 부딪혔어요. 전쟁에서도 살아남으셨던 분이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건 다 수포였죠. 주인공이 돌아가셨으니까. 주인공 없이 쓸쓸하게 출판기념회를 했습니다.

 

공군으로 복무 중 필리핀 클락 공군 기지에서 찍은 사진.

전쟁 후 고향 사람들은 대구공항 변두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어요. 직장이 없으니까 나는 대구비행장 하우스보이로 들어갔습니다. 하우스보이로 들어가면 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니까요. 그때는 ‘꿀꿀이죽’이라는 게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돼지한테 준다’고 하고 음식 찌꺼기를 가지고 나와요. 그래놓고 그걸 파는 거예요.

시장 앞에 가면 가지고 온 그대로 파는 것도 있고 요리를 좀 해서 파는 것도 있었어요. 고춧가루, 마늘 넣고 찌개를 끓이는 거죠. 그게 부대찌개의 원조입니다. 그걸 우리가 사먹었어요. 그런데 식당에서 나온 찌꺼기니까 담배꽁초, 종이 들어간 건 약과였죠. 어느 날은 이쑤시개도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쑤시개가 확 찌르면 입에서 피가 펄펄 나고 혀도 찔리고 그랬어요.

‘야, 이걸 어떻게 할 수 없나’ 생각해서 군목()을 찾아갔습니다. ‘압’이라는 소령이었는데 내 영어를 한참 듣고 있더니 “너 그거 먹는다는 소리냐”고 그래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너도 먹느냐”고 물어요. “나도 먹는다”고 했죠. 또 “어디 가면 파느냐”고 물어서 “이 앞 시장에 가면 판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바로 지프차를 타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러다가 그것도 못 먹게 생기면 어떡하나?’ 생각했죠. 그 찌꺼기를 사람이 먹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더러운 깡통에 실어서 ‘돼지죽’이라고 했던 걸 가지고 나가서는 한국 사람들이 먹는다니까 소령님이 믿지를 못했어요. 그렇게 조마조마하면서 갔죠. 그랬더니 이 소령님이 찌개를 두 그릇 사더니 당신이 한 그릇 잡수시고 나를 한 그릇 주더라고요.

시장 사람들이 보기에 미군 소령이 와서 꿀꿀이죽을 사먹으니까 이상하잖아요. 근데 그 소령님이 눈물이 글썽해지는 거예요. 한 그릇 다 잡수시고는 다시 지프차를 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부대로 돌아와서 나를 캠프에 데려다 주고 이튿날 공문을 가지고 왔어요. UN군 사령관, 미 8군 사령관 이름으로 한국에 있는 UN군에게 ‘한국 사람들이 먹으니까 찌꺼기를 넣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합니다. 그다음 일요일에 소령님이 교회에 나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뭐라고 하는지 박수를 열 번을 받았어요. 다음에 보니까 깨끗한 깡통에 페인트칠을 싹 해서 거기에 담아주는 거예요. 그 소령님이 찌꺼기가 있는지 없는지 검사도 하고 그러셨어요. 그분이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이죠. 요즘도 부대찌개집 보면 그때 생각이 나지요.

 

경북대학교 박사과정 졸업식 때. 한국전쟁 후 군의관이 부족해서 의대에 가면 징병 보류가 된다기에 의대를 지원했던 이시형 박사는 결국 의대에 갔고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

그때는 하우스보이하느라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어요. 우리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접장 집안이니까 형이 선생의 전통을 이어야 하는데 형은 군대에 갔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범대학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서울 아이들은 피란 다닌다고 공부를 못 했어요. 할 수도 없었고요. 슈샤인보이(구두닦이)를 하고 그랬죠. 그래도 낙동강 이남 아이들은 공부를 좀 했어요. 우리는 5공군 사령관 사령부가 학교를 내줘서 동대구역 근처 기왓골에서 공부를 했으니까요. 대포 소리를 들어가며 공부를 했죠. 그런데 전쟁 중이니까 선생님이 출석도 안 부르고 수업만 겨우 하는 거였어요.

그래도 나는 대학에 가야 하니까 원서를 내려고 했죠. 근데 친구놈 여섯 명이 다 의과대학을 간다는 거예요. “야, 너 왜 갑자기 의과대학이냐”고 물었더니 군의관이 워낙 부족해서 의과대학만 가면 의사가 될 때까지 징병 보류가 된다는 거예요. “야, 그거 괜찮다” 했죠. 지금 젊은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징병 보류가 의대에 간 첫 번째 이유예요. 또 두 번째는 그때 의사 아들은 다 부자였어요. 의사가 되면 밥은 안 굶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의사가 돼서 인류를 구제한다’는 그런 생각은 정말 없었어요. 시류에 홀려가지고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친구들 따라간 거예요. (웃음)

 

우리 집 형제들은 아버지 성격을 닮은 얌전한 그룹이 하나 있고 할머니 성격을 닮은 활발한 그룹이 하나 있습니다. 무당 기질이라고 하지요. 나는 무당 기질이었어요.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죠. 그때도 말을 참 잘했어요. 싱거운 소리를 잘 하니까 학생회장 나가면 나는 무투표 당선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동생 둘이 독립운동을 해서 골병 든 사람이었죠. 삼촌이 하얼빈 형무소에 있었으니까 변호사를 사서 하얼빈까지 가야하는데 그 거리가 얼마겠어요? 기차 왕복 여비하고 숙박비, 변호사비 하면 논이 몇 마지기가 날아가는 거예요. 동쪽 비행장이 전부 우리집 논이었을 정도로 굉장히 부자였는데 그게 다 없어졌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위험한 아이로 봤지요. 아버지 유언이 ‘정치하지 말아라’였어요. 정치인들은 개인으로는 똑똑해도 정당의 이익을 안 따질 수 없으니 매사 쉽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정치를 안 한 건 잘 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잘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 이시형 박사의 모습. 비행장에서 경비를 서다가 졸았다는 이유로 미국인 상사에게 매를 맞은 뒤 예일이나 하버드대학에 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실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하우스보이를 하다가 ‘스페셜 가드’라고 불렀던 경비병 일을 했어요. 비행장 경비를 미군 인력으로 다 못 서니까 외곽 경비는 민간인들이 섰어요. 경비병이 하우스보이보다는 월급이 나았거든요. 근데 공항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요. 우린 내복 하나 입을 형편이 안 됐는데 말이죠. 그런데 비행장에 가면 비행기 내릴 때 비추는 유도등이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가면 우선 바람은 피할 수 있었지요.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갔다가 잠이 들었나봐요. 그때는 전시니까 경비 보는 사람이 졸면 그건 사형감이예요. 적군이 쳐들어오면 몰살당하잖아요.

빵빵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순찰 도는 상사가 보이더라고요. 말채찍 같은 걸로 정신 차리라고 얼마나 때렸는지 등허리가 후끈후끈할 정도였어요. 그리고서 집에 돌아왔는데 가족한테는 이야기를 못 하겠고 셋방에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 중에 서울 상대를 다니는 1학년 형이 있었어요. 그 형이 저한테는 멘토였죠. 그래서 “형,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형도 깜짝 놀라면서 “야, 너 그 원수를 갚으려면 너는 미국 가서 예일대학이나 하버드대학을 가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나는 예일대학, 하버드대학이 있는지 몰랐죠. (웃음) 그런데 그 형이 이야기한 게 두고두고 내 머리가 남아 있더라고요.

 

네, 군대 제대하고 바로 예일대와 하버드대 두 군데만 지원을 했어요. 특히 예일대학에는 립튼 교수라고 중공-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불렀죠-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토탈리즘>이라는 책을 낸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었는데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이에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을 다루었죠. 전 그 교수님이 좋아서 예일대에 가기로 한 거예요. 근데 만약 예일대가 안 되면 하버드에 간다 했었죠. 두 군데 원서를 내니까 다 면접을 오라고 해요. 그래서 예일대에서 먼저 3일 동안 면접을 봤어요. 면접을 보고 나니 나를 안내해줬던 선배가 “너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그래요. “하버드 가야 한다” 했더니 “하버드를 왜 가느냐.”해서 “떨어지면 어떡하느냐”라고 했죠. 그랬더니 “너 인마 주임교수가 그 정도로 이야기하면 합격한 거야. 네가 하버드를 가고 싶으면 몰라도 여기 떨어질까봐 가는 거라면 안 가도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일대 한 군데만 지원했습니다.

 

예일대 캠퍼스에서. 하버드나 예일에서 공부하겠다고 유학을 떠났던 이시형 박사는 예일대에서 사회정신의학을 공부했다.

그때는 정신의학만 해도 희귀할 때입니다. 대구에 정신과 의사가 딱 한 명 계셨어요. 사회정신의학이라고 하면 지금도 사람들이 잘 몰라요. 개인이 정신병에 걸리면 정신과에 가면 되지만 사회가 정신병에 걸리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요즘처럼 폭력이 많고 도박 환자가 많다면 이건 한국 사회가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사회정신의학은 이렇게 사회정신병리를 연구하는 거죠.

그런데 그때 미국사회는 정신분석이 주류였습니다. 정신분석이 정말 비싸서 한 시간에 300달러씩 일주일에 두 번 10년~20년을 상담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는 그렇게 치료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더더구나 대구에 말이에요. 그래서 정신분석은 내가 공부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일대를 다니면서 다른 공부를 계속 했어요. 하버드, 콜롬비아, 코넬 등에서 외도를 한 거죠. 그때 내가 뇌과학 공부를 따로 했는데 그 뇌과학 공부가 요즘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강북삼성병원 개원 30주년 기념식에서. 경북의대 교수로 일하다가 시위하던 학생들이 정학, 퇴학당하는 걸 지켜보기 힘들었던 이시형 박사는 결국 사표를 내고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으로 옮겼다.

경북대학교 학장님, 총장님이 미국까지 나를 데리러 왔어요. 그때 경북대에 정신과 교수가 딱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이 뭔가 소란을 피해 피난을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국가고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정신과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돌아온 거예요. (웃음) 근데 그때는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 유신 반대 등 매일 데모만 하고 공부를 안 했어요. 그때 내가 학생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신 반대 데모하다가 학생 27명이 정학, 퇴학을 당한 겁니다. 내가 어디 다녀오니까 현관에 퇴학자 명단이 쫙 나와 있는 거예요. 완전히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내가 차를 가지고 총장실에 갔는데 문을 안 열어주죠. 그래서 밖에서 창문을 다 두들겨 부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학생과장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이럴 수가 있느냐.” 그 사건이 있고는 내 양심으로는 교수를 못 하겠더라고요. 교수를 하면 학생 편을 들 수도, 정부 편을 들 수도 없는 시대였어요. 그러니까 도저히 내 양식 가지고는 교수를 할 수 없었어요. 사표 수리가 안 돼서 1년 넘게 기다리다가 결국 떠나버렸어요. 다른 대학에서 오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나는 대학교수 안 한다”고 했어요. 그때 우리 선배가 서울 고려병원에 이사장 원장을 하고 있어서 마침 저를 잡으러 온 겁니다. 그래서 ‘아이고 잘 됐다’ 했죠. 그렇게 고려병원에 들어왔어요.

 

교수 대항 테니스 시합에서. 미국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사회적 갈등을 겪었을 때 테니스를 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시형 박사는 테니스를 정말 좋아했다고 회고한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시형 박사다.

합리적인 사회인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오니까 제2의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사람들이 안 바뀐 겁니다. 미국 갈 때만 해도 1960년대 초반이었는데 돌아와보니 버스도 다녀요. 근데 버스를 타 보면 정류장에 사람이 없으면 안 서고, 내가 내린다고 해도 안 세워줘요. 어떨 때는 또 혼자 기다리고 있으면 그냥 지나가고 그랬어요. 그때 나는 이런 사회를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어요. 갈등이 심했죠. 그때 스트레스 푸는 게 테니스밖에 없었어요. 교수 시절 죽으라고 테니스만 쳤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아이들이 없으니까 테니스 치고 환자 겨우 보던 시절이었죠. 그때 너무 무리를 한 거예요. 디스크 때문에 허리, 무릎이 완전히 내려앉았어요. 내 테니스 파트너인 김형조 박사가 어느 날 “이 박사, 이제 더 이상 테니스 치면 안돼” 그러는 거예요. 내가 봐도 안 되겠어요.

그래서 디스크 수술을 한다는데, ‘야, 의사란 놈이 몸 관리 하나 못해서 수술도 하고 약도 먹고. 의사로서 직업적인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조금만 자기 생활을 다듬어가면서 했더라면, 이 고생은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내가 자연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치병이 아니고 예방이다.” 중풍에 걸리기 전에 예방을 해야 하고 예방은 치병 중심의 현대 의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자연체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과학 문명 중독증에 빠져 있어요. 생각해봐요. 한 블록도 걷지 않죠. 지하철을 타보면 에스컬레이터 앞에 젊은이들까지 긴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계단은 텅텅 비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병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 자연의학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고 전세계 유명한 자연의학 센터를 다 돌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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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지를 못해서 차를 몰지도 못했어요. 서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버스를 타고 다녔죠. 근데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니까 한국 사회가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서울이 규모로 보면 국제도시인데 사람들이 도시 문화 감각이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교통질서 하나 지킬 줄 몰랐던 거예요. 다방에 가 보면 네 사람이 앉아야 할 테이블에 혼자 있으면 합석하자는 얘기를 못해요. 여자가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가면 남자는 ‘좀 도와 드릴까요’ 소리를 못하는 거죠. 이런 것은 도시인들의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도시가 엉망이라는 생각에서 내가 그 책을 지은 겁니다. 이 책이 17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죠.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니까 한국을 워낙 몰랐어요. 미국에는 화병 환자들이 없어요. 표현하는 문화니까 화가 쌓이지 않죠. 근데 한국에서는 표현을 못하고 쌓아놓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고부간 갈등이 심했어요. 시어머니는 구박하고 아무 말도 못하는 며느리들이 피해자였습니다. 남편들도 죽을 지경이죠. 누구 편을 들겠어요?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는 없어요. 그래서 ‘화병’이라는 용어를 학회에서 발표했죠. 울화병이란 건, 폭발하기도 하고 누굴 만나면 넋두리가 많은 증상입니다.

 

자연의학을 공부해보니 한의학하고 관계가 많더라고요. 자연체로 살자는 거죠. 차 타고 다니는 게 자연체가 아니에요. 걸어다는 게 자연체죠. 요즘 우리는 여름은 겨울처럼 지내고 겨울은 여름처럼 지내죠. 에어컨을 너무 많이 트는 건 자연체가 아니에요. 찬물도 마시면 안 되는 겁니다. 냉장고에 있는 물은 6도예요. 우리 몸이 37도인데 6도 되는 물이 몸에 들어오면 목에서는 잠시 시원하지만 몸속에 들어오면 전쟁이 납니다. 위경련 나는 사람, 배가 아픈 사람, 설사하는 사람들 있죠. 우리는 그렇게 찬 물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인류가 300만 년이나 아프리카 대륙에 살았잖아요. 그래서 자연의학 센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 선마을의 자연의학 센터를 만든 거예요.

 

지금 우리 생활환경이 고약하잖아요. 밖에 나가면 교통사고 걱정, 버스를 타면 소매치기 걱정, 공해 걱정 등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폭음, 폭식, 늦잠 등 생활 습관이 병을 만드는 거예요. 당뇨병, 고혈압, 비만 모두 생활 습관병입니다. “우리가 생활환경과 습관을 개선함으로써 병을 예방하자.” 선마을의 철학이고 이념입니다.

지금도 거기 가면 의료 시설이 없습니다. 모든 게 불편해요. 차를 세워놓고 숙소까지 걸어가야 하죠. 식당에서 제일 위로 올라가려면 300개의 계단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계단에 올라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계단 공포증에 걸려있죠. 근데 여기는 비탈길과 계단 밖에 없으니까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면 알게 돼요. ‘계단 올라가도 별 게 아니구나.’ 생활 습관을 바꾸는 거예요. 우리 몸은 걷는 게 즐겁도록 유전자가 설계돼 있어요.

또 식탁 위에는 30분짜리 모래시계가 있어요. 한 끼를 30분 이상 먹고 한 입에 30번 이상 씹자는 약속입니다. 여기에 오면 ‘당신의 생활 습관 때문에 지금 당신의 몸 컨디션이 이렇게 되어 있다, 고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거죠. 이렇게 선마을에 다녀간 사람이 3만 명이 넘습니다. 전국민을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게 제 계획입니다.

 

이시형 박사는 인간은 자연체로 살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여름은 여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지내는 것,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힐리언스 선마을이라는 자연의학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홍천 ‘선마을’ 별명 중 하나도 ‘세로토닌 캠프’예요. 우리가 좋은 숲에 들어가면 세로토닌이 펑펑 쏟아집니다. 오감의 쾌적한 자극이죠. 풀, 맑은 공기, 새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 등이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겁니다. 세로토닌은 본능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다스리는 신경 전달 물질이에요. 뇌 활동에 깊이 관여하는 행복 물질, 행복 호르몬이죠. 온화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만들어줍니다.

세로토닌의 기본은 ‘슬로(slow)’ ‘심플(simple)’ ‘스몰(small)’로 천천히, 욕심 부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갖고, 간단하고 여유 있게 살자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난 반세기 격정적인 세월을 살았습니다. 후발 국가였으니까요. 따라가기 위해서 밤을 새우고 그랬잖아요? 사회가 공격적이니까 젊은이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걸 해소하려고 하다 보니까 스포츠에 열광하고 도박에 열광하고 콘서트에 열광하는, 말하자면 ‘열광의 문화’였습니다. 그게 엔도르핀이에요.

이제는 그런 시대는 끝났어요. 요즘 CEO들도 보면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시대가 바뀌는 겁니다. 이제는 ‘돌격! 나를 따르라’는 식의 CEO의 말은 직원들이 안 듣습니다. 지금까지는 하이테크 시대였죠. 누가 기술을 발명하느냐의 문제였어요. 이제는 하이컨셉입니다. 어떤 컨셉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나뉘는 겁니다. 하이컨셉은 인문학을 공부해야죠. 한국 사회가 목표 지향적이다 보니까 다리가 무너지고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그랬죠.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정도를 밟아서 차분하게 가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선비들이 세로토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뇌하고 헛된 욕심이 없었죠. 이제 우리도 경제적인, 외적인 성장보다는 정신적인 성숙의 시대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단 뛰고 생각했습니다. 중간에 상상도 못하는 변수들이 생겼죠. 근데 변수가 너무 많으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엔도르핀적인, 격정적인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에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신중히 생각하고 뛰어야 합니다. 신중히 생각하면서 딱 결정되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조금 출발은 늦을지 몰라도 일단 출발하면 사고 없이 잘 가게 되죠. 그렇게 세로토닌적인 기업, 세로토닌적인 개인, 세로토닌적인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한 40년 됐습니다. 내가 앓고부터 했죠. “이 아픈 다리, 허리를 이끌고 어제 하루를 잘 달렸으니 정말 수고했다, 고맙다, 내가 조심할게. 잘 부탁해.” 내가 진심으로 아침마다 하는 말입니다. 자기 몸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만큼 회복이 된 것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때는 걷지도 못하고 지팡이 짚고 다녔는데 수술도 안 하고 이렇게 회복됐잖아요. 내 몸에 감사를 할 수밖에 없죠.

 

인생은 참 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평균 수명이 길어졌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거든요. 살아보니까 인생은 굉장히 길어요. 그 말은 단거리 한 바퀴만 돌면 되는 게 아니고 마라톤 준비를 해야 하는 겁니다. 일시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고요. 원칙주의자들이 살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깁니다. 정의롭게 살고 원칙대로 사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서 내 삶을 바친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젊을 때는 많이 모아야 하지만 또 베풀어야 해요. 우리가 아직도 베푸는 문화가 인색하지만 젊은이들은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의사로서 인류 복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한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싶습니다. 큰 부자도 아니고 큰일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사회정신과 의사로서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일은 작게나마 최선을 다했다. 그런 사람으로 기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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