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데우스, 2016, 유발하라리

2024. 3. 4. 15:28책 읽기 영화보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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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잘 정리된 책이다 싶다

감탄이 나온다

책 장수는 많지만, 군더더기가 없어 보인다

세가지 생각을 시험치는 기분으로 정리해본다

1) 상호주관성의 합의, 협력 모드 : 인간의 경쟁력 쟁패력의 원천

개별적으로는 특별히 나은 점이 없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인간은 세상을 제패했는가? 100만명의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고, 러시아 혁명에서처럼 1억 2천만명의 농노들이 3백만명의 귀족계급에 통제될 수 있었고, 이들 3백만명은 2만 3천명의 정예 볼쉐비키들에게 점령당했다.

상호 협력할 줄 아는, 2만 3천명의 집단이 3백만명의 귀족을, 나아가 1억 2천만명의 농노를 제패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의 합의, 이는 "상상력의 합의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들에는 없는 반면,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하는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

상상력의 합의, 이를 자꾸 만들어 내는 것, 이런 형성과정이 살아있다면 국가는 생동력이 있는 것이고, 사실 국간라는 존재도 도시국가도 아니요, 로마 제국도 아닌 소위 국민국가라는 존재도 상상의 존재 합의라는 것이다

2) 이야기뇌와 경험뇌: 다니엘 카네만의 논문에서 나온 것 . 사실 인식과정 이게 간단한건 아니다. 사람의 경험, 감정이 전부다. 내가 이쁘다고 생각하면 그게 다라는 식의 주장에 절대 과학적 근거는 부족하다는 논거.

사람은 자기 경험뇌와 이야기뇌의 통합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감정의 메커니즘이 자기가 자기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주장이고, 한편 불교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제법무아, 제행무상이라, 그 어느것도 궁극적 실체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면, 단지 인연에 따른 작용만이 있다면, 그걸 어찌 담보하리요.

그래서 민주적 의사결정은 아름다움에 대한 표결을 처리함으로써, 누가 훌륭한 정치인으로서 대의제를 수행할 수 있을지, 투표를 통해 결정하지만, 이 과정에서 얼마든지 여론조작 (집단적 반응감정의 조작)이 가능할테고, 적절한 부정부패도 발생한다면 이를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는 숙제로 남는다

3)성장이 최고다. 중세까지만 해도 성장이 없는 상황에서 한쪽이 더 혜택을 보려면 다른쪽이 그만큼 내줘야 하는터, 그러다 보니 거의 1000년간 그냥 그대로의 경제사회모습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이 선호되고, 이는 탐진치의 탐욕, 그 에너지에서 발현되고 커지는데,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런 개인의 탐욕, 감정을 인정 수긍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것. 이를 집단 지도체제로, 집단 두뇌로 통제하려던 러시아 소련은 1989년에 무릎을 꿇은 것 처럼, 결국 개인들의 자기추구라는 욕심을 허용하는게 다양하고 더 성장에 도움되는 건 맞는 것 같다. 비록 그 욕심의 동기와 모습이 허접하고 짜증스럽더라도, 마치 고속터미널 상가에 눈반짝이는 그 수많은 예쁘장한 아줌마들의 패션 추구가, 자본주의 시장이기에 가능한 것처럼. 이는 누가 일률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건 아니다

내가 유발 하라리의 책에서 가장 깊은 느낌을 받은 건, 바로 이 "성장론"의 정당화이다. 그 성장의 방식과 적절한 메커니즘 관리가 필요하되, 기본적으로 인간의 탐욕이 적나라하게 추구되는게 성장에는 최선이라는 것

성장율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내가 지금까지 30여년간 고민하는 부분인데, 사실 잘 모른다. 이자율 10%라 함은, 그게 제대로 되려면 매출액이나 영업이익이 10% 정도 이상 성장하면 가능할텐데, 이자율을 감당할 수 있는 성장이 궁극적으로 나오는 원천은 무얼까? 신용을 받기 위한게 이자인데, 이것은 한편 성장에대한 개연성, 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올 것이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신용이 과도하게 확대 심화된 상태에서도 어떤 "ORGANIC GROWTH"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싶다.

어쨋든 성장은 되어야 한다는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 요청이다

이에 대한 내 마음의 수긍에는 금번 하라리의 책은 획기적 기여를 해준 셈이다 싶다. 그리고 욕심을 수긍한다는데에서, 하원의원들의 그 추태, 언론의 허접한 노력 모습들도 수긍이 될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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