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9. 15:05ㆍ책 읽기 영화보기 등
신뢰하는 번역가 정영목씨 이름이 있고
출판사도 한길사, 서문에는 오랫만에 보이는 함석헌님의 이름
책이 850쪽이나 되는 방대함
2001년에 번역된 책
그래서 신년 초에, 미사 후에 성당서고에서 빌렸다
또하나는 비노바 바베, 개인 전기 책도 작년 말에 읽은게
작년 4월 안나푸르나 등 포함한 네팔 일정으로 알게된 인도 지역 인연
그거의 연장선으로 책을 들게 되었다
1869~1948
암살당하신 걸로 알고 있어, 80대까지 살았던 비노바 바베에 비해서는 요절하신걸로 아쉽게만 생각했었는데 영면 당시 79세셨으니
그렇게도 단식 등의 고행을 하던 분으로서,
정치적 풍랑 속에 계셨던 분으로서, 또 인도의 평균 수명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삶의 궤적을 이끄셨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 마무리에, 암살범인 인상 좋은 힌두교 37세 신문편집장과 경영인 두사람의 무려 6시간이나 읽었다는 최후 진술서가 꽤나 설득력 있게도 들리면서 왜 간디가 인도 사람에 의해 암살되엇는지 경과와 정황에 대해 비교적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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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같은 인도인으로 현대적 시각으로, 그리고 꽤나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써, 1920년대 로맹 롤랑 등이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로 씌였던 자서전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인도 당국에서 발간한 마하트마 시리즈 전 90권과도 다를 것이다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간디는 성자라고 말하기도 뭐한, 그냥 우리와 같은
아니 정치인이엇음을 알게 된 것 같다
오히려 평생 정적이었던 통치국 영국의 처칠의 거친 표현, 후진국형 노쇄한 정치인이라는 비평도 확 와닿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네루가 생각은 달라도 워낙 영향력이 커진 분이라서, 한번도 대놓고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못했던, 그래서 협상이나 목표 달성에 잇어서 만만치 않은 정치력을 발휘했던 분이 간디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개인생활에서도 장남 하릴랄은 끝내 상처만 서로 남기는 부자관계를 보였고보여, 장례식에서도 장남은 역할을 하지 못했고, 관중의 한명으로 참관한 장남은 막내 동생 집에 숨어 묶었고, 둘째가 중심이 되었고, 세째는 여전히 남아공에 체류했으니, 아들 농사가 그리 무난한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좀더 혹평을 보니, 1920년 경,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테러리즘이 확산되엇던 시절에 요절한 틸락으로 인해, 이후 인도 대중에게 명성이 간디에게 독점되엇던 것 같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니 파키스탄을 분리시키려는 이술람주의자 진나에게 늘 끌려다닌다는 지적을 받고, 그게 암살범의 명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끌려다니면서 본인의 영향력 보존에만 지향했으니, 5분지 1에 해당되는 파키스탄이 중간에 난도질 당하고, 그것도 모잘라서 펀잡 지방 등에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힌두교 인도인 학살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대해 델리에 거주하던 이슬람 인도인들에 대한 보복 살인이 벌어지는 등, 세계적이고 객관적인 흐름에 오히려 간디는 폐해만 끼쳤다는 주장이 암살자의 낭독문에 나온다. 간디의 유일한 업적은 영국이 인도에서 손떼게 하는데 그쳤다는 것이고, 오히려 60년 역사의 인도 국민회의에서 영향력을 1945년까지는 꽉 잡아쥐는 바람에 인도 분리및 피바람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1945년 되면 독일 및 일본의 패전국 처리로 인해서, 인도도 독립하지만, 여러나라들이 동시에 독립하게 되는바, 굳이 독립이란게 지상과제였다면 이 역시 간디의 기여라고만 볼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가지 교훈은, 간디의 금욕과 금식, 단식 노력이었다
확실히 식탐은 의외로 문명의 병이거니와, 맛난 음식에 대한 집착은 삶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걸 감안한다면, 평생 콩과 바나나 음식, 염소젓, 과일로 이어가고, 일주일에 한번은 단식을 하고, 한끼 정도는 건너뒤는 그런 개인적인 노력지향은 결과적으로 간디의 건강과 수명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최소한 소고기 스푸라도 먹어야 건강하고 체력을 이끌 것이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갔던 간디는 162센티 키에, 평균 48키로 체중으로 대략 무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거기에는 이렇게 절식, 금식, 채식주의가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보여 이런 생활습관을 좀 따라야 할 것 같다. 틁히 음주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특히나 문명과 기계화에는 저항적이었던 간디, 시골스러운 생활이 어쩌면 더 우리에게 더 쾌적한 삶의 궤적을 주는 것 아닌가 싶고, 더욱이 정신생활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싶다.
잠깐 다시, 암살범의 주장의 정황을 다시 보면, 1500년경 무굴제국이 처음으로 인도 전역을 통일했던 모양인데 그 중심은 이슬람이었고, 비이슬람에는 인두세를 부과하면서, 세금만 내면 어떤 종교라도 포용하는 대국적 운영이 있어, 절대 인구는 더욱 많은 힌두 인도가 (힌두스탄), 이슬람과 더불어 번영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힌두인도인이 느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 분리의식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국 등이 진출하면서, 그리고 제1차 대전으로 터키가 술탄체제가 ㅇ분해되면서 절대다수 힌두인도가 등극해서 정리하려는데, 이에 분리주의로 나오는 이슬람에 대해 타협적이기만 했던 간디, 그이의 정책 방향을 본인의 권력 보존과 연루해서 해석하는 과격 힌두인도인에게는 같은 힌두인도인인 간디가 더 싫었던 것 같다. 이런 역사적 정황으로 세계 인구의 5분지 1이라는 거대한 인도는 결국 분리되고, 네루 정권은 출범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처칠이 계속 집권했다면 인도에 대한 손놓음이 달라졋을지도 모르는데, 일단 제2차대전이 마무리되면서 집권하게된 노동당의 애틀리는 서둘러 인도에서 손을 빼게 된다. 이런 세계적인 역학관계가 근원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다 싶다. 사실 간디는 나중에 대만으로 피신하다가 사망한 다른 의견의 보세라는 정치지도자와 결별하게 되지만, 둘다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물론 특히 간디는 친영기조를 유지하다가 나중에 독립을 원햇지만, 한국에서라면 두고 두고 지탄받았을 전시 참전군 모집에 능동적으로 나섰으니, 거대 대륙의 점령국가에 대한 태도는 색깔이 다를 정도라는 게 특기할만 하다 싶다.
다만, 간디가 크게 기여한건, 60년 역사의 국민회의가 주로 유산자, 인텔리 중심으로 운영되던게 대중으로 기반이 확대되게 하는 물꼬를 텄다는 것인데, 그게 딱히 유별나서 그랫다기 보다는 10여년 남아공에 체재중에 사티아그라하 (진리의 힘) 기조를 유지하다가, 그걸 인도로 귀국하면서도 시작했고, 당시 주요 지도자 몇명이 죽음으로써,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이름값을 독차지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언제나 언명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유보적으로 천명하면서 최종 해석에서 자유를 부과받으면서, 이름에 치명타를 맞지 않았다는 것 같아 보인다.
사실 사람들간에 어떤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간디는 집안을 대표하는 장남과 나중에 의절하게 되고, 영국 유학에 도움 줬던 경비 등을 충분히 본인은 보상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더 남는 돈은 민중을 위해 쓰기 때문에 가족들을 위해 도와줄 수 없다고 한 것,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정치지도자로서 존칭을 이어갈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간디 본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 따름인 것 같다 싶다. 사실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초기 영국 유학시절이나 변호사 개업 시절에 비교적 사치스러운 옷도 기꺼이 사서 입고, 좋은 음식점 문화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자세를 보면, 본인의 브라마차리아(금욕) 운동이 한명의 성자로서 보다는 나중에 객관적 상황에 맞추면서 변해갔던 것일뿐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본서의 저자가 인도인으로서 기술한게 상당히 객관적인 저술이었고, 이게 까다로운 한국에서였다면 친일파 못지 않게 친영파로 어떻게 비판받았을지도 사실 잘 모르겟다 싶기도 하다
당시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타고르도, 비교적 귀족 계급으로서, 품위있게 살았기에, 까다롭게 척도에 들어갔다면, 사실 인도에는 대부분의 지도자급이 대부분 친영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일찌기 만주, 소련으로 가서 활동했던 김일성 등 항일전선의 지도자들은 비판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겠지만, 그네들도 만약에 한반도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살아갔을지는 사실 백지상태로 봐야 할 것 같다 싶다.
그래서 소결론으로서, 간디라는 인도의 영웅 성자가 개인적으로 딱히 다른 부류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간디 암살 사건 직전에, 힌두 인도쪽 인사가, 간디에게 "어서 빨리 히말라야로 가시오"라고 지적할때 "나의 히말라야는 바로 여기입니다"라고 응답하는 간디, 그 모습들도 이후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시각은 얼마든지 있다고 보여진다
어쨋든 거대한 대륙 인도, 그 역사에서, 간디가 영국으로 돌아온 1915년 이훙, 1945년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주어지는 독립의 기회 그 30년의 세월동안 치명적인 변화가 없었던것이, 오늘날 간디가 인도의 마하트마로 불리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고, 그이에 대해 네루 같은 정치지도자들이 괜히 덤비지 않고 간디의 노선에 앞서서 반대하지 않으면서 이후 이슬람 파키스타, 나아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그리고 남쪽의 스리랑카가 분리독립하면서 오늘날 인도가 재편되었고, 이후 수천년의 종교전통을 이어가는 힌두 인도가 지금까지 존재하게 된 것 같다 싶다
본서를 읽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850쪽을 볼 수 있었던 계기는 아마 두가지 인것 같다. 1) 비노바 바베라는 간디 노선 인사의 전기를 읽게 되면서 인도에 대한 이해가 좀 생겼고, 이는 네팔 출장일정으로 직접 현지 분위기를 부분적으로 인지하게 되었고 2) 객관적인 간디에 대한 기술, 그리고 당시 인도와 영국, 세계정체 정황을 보게 되면서, 그리고 간디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이었고, 간디의 영향력 그 자체가, 이렇다할 경쟁구도 없이 이래 저래 이어지는게, 그런게 정치의 세계구나.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한국의 정치관련 뉴스 흐름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정치인들 하면 거리감이 생기는데, 이렇게 정치계라는게 원래 싸움의 현장이고, 그런게 욕망과 분노, 결국은 미망, 무명, 어리석음으로 통합되는 우리네 인간, 인간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계기로 삼고자 하는 일환 그런 취지로 읽게 된 것 같다. 그 누가 위대하고 별난 정치인일수는 없을테고, 끝내는 승자의 역사가 역사해석은 주도하게 되는구나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만, 이제는 좀더 한국의 정치인 뉴스를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는 눈살을 그렇게나 찌푸리지는 않은 상태에서 주마간산이라도 훑어보면서 덜 괴로울 수는 있을 것 같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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